설탕 독점과 현상 유지 사누키와 오키나와의 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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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 이야기

설탕 독점과 현상 유지 사누키와 오키나와의 국면

사쓰마 번의 시마즈는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실패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요. 그럼에도 사쓰마의 무사 비율은 전국 평균 5배나 많았어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무사들을 유지했더라도 다른 곳보다는 조금 과했다는 거 같아요. 그 결과 번의 재정상태나 생산성 저하가 유독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사들에게는 많은 지원을 했다고 해요.

 

설탕으로 만든 초코 케이크 사진입니다.

 

일본 설탕 시장의 전환점 사누키산과 와산본의 등장

세키가하라(기후현) 전투에서 죽을 뻔했던 사쓰마(가고시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아들 타다츠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은거에 들어갔다고 해요.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는 1609년 3월 4일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 당시 류쿠왕국을 3천의 병사로 침략을 감행 4월 1일 항복을 받아냈어요. 무역도 하고 평화롭게 지내던 오키나와를 하루아침에 침략했어요.

 

타다츠네의 사쓰마는 오키나와(류큐왕국)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아마미 오시마에서 나오는 설탕을 오사카에 독점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치솟는 설탕의 인기에 사쓰마는 아마미 오시마에 이어서 기카이 지마(喜界島) 도쿠노 시마(徳之島)까지 사탕수수 재배지를 늘리게 되요.

 

설탕을 만들지 못했던 일본은 오키나와의 설탕과 포르투갈 등에서 수입한 설탕이라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사쓰마가 더욱 오키나와의 설탕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해요. 8대 번주인 시마즈 시게 히데(1755~1787년 島津重豪)에 와서 끔찍한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이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쓰마 번은 오로지 사탕수수만을 재배하도록 당시 류큐국(오키나와) 사람들을 몰아 세웠어요.

 

작물이 자랄 수 있는 거의 모든 땅에는 사탕수수를 키웠기 때문에 주민들이 먹을 야채나 쌀은 꿈도 꿀 수 없었다고 해요. 설탕만 있는 지옥의 시기가 1747년 시작되어 1871년 백 년이 넘게 지속되었어요.

 

설탕 제조 기술이나 사탕수수 재배 법은 밖으로 반출 금지였고 반출이나 훔친 자는 사형이었다고 해요. 질이 떨어지는 설탕을 제조한 사람에게는 족쇄 형벌이 돌아왔고 설탕이나 사탕수수를 핥기만 해도 채찍질에 처할 정도였어요. 거기에 더해 사쓰마 번은 화폐도 금지, 물물 교환하는 방식으로 고혈을 짜내게 되요. 시민들이 꼭 필요한 일용품은 시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기고 사탕수수는 헐값으로 매기는 수법이었어요.

 

이러한 결과로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만약 빚을 못 갚게 되면 노비가 되는 결말이죠. 오키나와 시민들에게 있어서 설탕은 생지옥에 쓴맛이었다고 해요. 오키나와 설탕은 사쓰마 번의 독점 상태가 계속되었어요. 사누키국 다카마쓰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조 방법에 대한 연구를 다카마쓰 5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야스공(松平頼恭公)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사쓰마의 설탕 독점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다카마쓰의 의사였던 이케다 겐조(池田玄丈)와 그의 제자가 연구를 시작했으며 스승 이케다 겐조가 사망하자 제자 무코야마 슈케이(向山周慶)가 이어받아 연구를 계속하게 되요.

 

연구가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기 1788년 흑설탕의 섬 아마미 오시마의 세키 료스케(関良介)라는 인물이 병에 걸려 아픈 것을 무코야마 슈케이가 병을 낫게 해주었어요.

 

병이 나은 세키 료스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탕수수를 아마미 오시마에서 가지고 나와 재배하는 방법을 사누키 다카마쓰에 알려주게 되요.

 

어찌 되었든 1790년 처음으로 흑설탕 450근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4년 후엔 사누키산 흑설탕이 오사카 시장에서 거래가 되고 1798년엔 최초의 백설탕 와산본(和三盆)도 오사카 설탕시장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