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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 이야기

에도 시대 화재의 진원지 메이레키 대화재

by 키리안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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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메이레키 대화재 후 소방대가 증원되거나 만들어지며 에도성 주변인 고지마치(麹町) 오차노미즈(御茶の水) 사나이사카(佐内坂) 이다쵸(飯田町)를 둘러가며 배치되었다고 해요. 소방대의 주 임무는 에도성으로 오는 불길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일본의 가을 풍경입니다. 에도 시대 메이케리 대화재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대혼란, 피난길에 세워진 서민들

 

그때 당시 화재를 진압하는 방법은 일일이 물을 가져다 끄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건물들을 부수고 해체하는 방법으로 에도성으로 향하는 불길을 끊고 막아야 했다고 해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한시가 급한 화재 시 임기응변식의 대응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예방이 더 절실했던 시기였다는 거죠.

 

멀리 볼 수 있는 망루와 보초도 세웠다고 하는데요 여기서도 의문이 드는 것은 메이레키 화재의 진원지는 서민들이 사는 중심부에서 떨어진 혼묘지 사찰 쪽이었다고 했어요. 1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할 정도로 큰 화재로 번질 때까지 대피하지 못한 것도 의문이에요.

 

그래서 도시 재건을 위해 막부가 일부러 불을 냈다고 하는 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사찰 주변에는 에도 막부 간부들의 집도 있어서 그들이 대피하며 알리는 것이 수월했을 것 같은데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은 거죠.

 

당시 에도시대는 264년간 대화재의 기록이 90건 정도였다고 해요. 평균으로 나누면 3년에 한 번은 크고 작은 화재가 일어난 셈이에요.

 

서민들은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옆집과 벽이 붙어있던 판잣집에서 살림살이를 지키려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나쁜 선택이 되었을 것에요.

 

반대로 상류층들의 대피는 아랫사람들이 귀중품을 수레에 싣는 것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짐을 싣는 수레의 효용성은 좋았지만 무거운 수레들이 좁은 길에서 맞닥트리기라도 하면 길을 막는 벽이 되면서 더욱 위험에 빠졌다고 해요.

 

당시 에도 면적의 20%에 서민 인구 50%가 살았다고 해요. 나머지 80%의 면적을 인구 50%가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에도성을 비롯해서 상류층의 집과 사찰들이 넓은 면적을 사용한 거죠.

 

생필품보다 생계유지

 

서민들도 생계를 위한 물건들을 챙겨가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을 것 같은데요 그중 소바 집은 제면 도구가 가장 필요했을 거예요. 키바치(나무 그릇)나 밀대, 칼, 등이 눈앞에 아른거렸을 것 같은데요 가장 큰 도구였던 키바치는 들고 대피하기 보다 주변에 우물이 보이면 빠트려서라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소바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인 나무 그릇은 밖에서부터 깎아나가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둘레가 있는 나무여야 했는데요 쉽게 구하기 힘들었을 거에요.

 

목공 기술이 발달한 현재는 나무판을 본드를 이용해 붙인 후 만들 수 있어요. 가령 얇은 합판이라도 계속 붙여, 두께가 맞춰지면 기계로 깎아 칠을 하는 방법이에요..

 

본드로 붙여 만든 저렴한 키바치부터 장인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깎아내어 만든 것은 천만 원대의 고급 품까지 나와있는 것 같아요. 업소용으로 나온 크기의 키바치들은 한국 돈으로 30~80만 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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